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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여름과 나

여름과 나

원래가 갈비씨인 나는 여름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다. 몸이 약한 편이라 여름을 타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여름철에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 몸뚱아리를 옷으로 커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겨울엔 그래도 옷으로 깡마른 내 몸을 가릴 수가 있다. 그러나 여름엔 도저히 불가능하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시원한 연구실에서 한여름을 보낼 수만 있다면 매일 같이 양복이라도 입고 앉아 있을 수 있겠지만, 선풍기 하나만 갖고 그 무더운 삼복더위를 지내려니 옷맵시고 뭐고 그저 노타이 바람으로 갈비를 온통 노출시킨체 지낼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내 몸매에 대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은 나에게 있어 '외로운 계절'이다. 흔히들 가을을 고독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 가을과 겨울엔 두둑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서면 내 풍채도 웬만큼의 볼륨을 갖추게끔 되어,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가도 어느 정도 포근한 포옹을 해 줄 수 있지만, 여름에는 포옹을 해 줄 자신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유행했던 가요 중에 <사랑은 계절따라>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 가사의 내용과 나의 러브, 스토리는 그대로 들어맞는다. "겨울에 만난 사람, 여름이면 떠나가네...."라는 가사 그대로 내 경우에도 겨울에 만난 연인이 여름에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겨울엔 두툼한 오버코트를 걸치고 만나니까 그래도 믿음직해 보였는데, 여름에 보니 너무 앙상한 갈비씨에 도무지 남자다운 기운(벌판 같은 가슴이 있어야 거기에 폭 안길 수 있을 게 아닌가)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만 정나미가 떨어져서 도망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외로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여름철에 여성들이 입는 섹시한 의상들이다.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 있는 나의 눈에는,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원색으로 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고 으시대며 걸어가는 여성들의 발랄한 몸매가 늘 스쳐 지나가니 말이다. 어깨가 푹 파이고 고개를 숙이면 젖가슴이 다 드러날 정도로 가슴을 깊게 판 웃도리를 걸치고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는 여자들-하얀 손끝에는 빨간색 매니큐어 발톱에는 파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으면 더욱 미친다-을 보노라면 견물생심이나 화중지병이라, 내 외로움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989> 중에서



위 글은 최근 읽게된 마광수의 에세이집에서 눈에 띄는 글이었다. 사진의 배경을 보니 80년대의 연세대이고, 지금처럼 바람불면 좀 쌀쌀한 계절에 찍은 것 같다. 20년 전의 마광수가 여름철 느꼈던 자신의 마른 몸에 대한 글이 지금의 내가 여름이 되면 느끼는 괴로움가 어찌나 비슷하던지..

나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린 학생들도 가끔 그런 말을 한다 '살좀 찌세요~!','여자친구 있으세요?'(거의 항상 없을 거라는 기대감에 질문을 하고 내가 있다고 대답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런 나를 안아주는 여자친구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대학시절을 되돌아보면 난 두 번의 연예를 했었는데, 첫 연애는 가을에 시작해서 다음해 2월에 헤어졌고 두번 째는 가을에 시작해서 다음해 4월 즈음 헤어졌다 다시 가을에 재결합 했고, 또 여름이 오기 전에 해어졌었다.

옷이라는 존재가 무엇보다 내 몸뚱아리를 가리는데에 큰 목적을 가지게끔 되어버리는 여름날의 그 기분이 나도 참 싫었다.

이제 가을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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