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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

'계몽'이 필요한가?

지난 촛불 시즌에 벌어졌던 '지도'의 논쟁, gyuhang님의 다른 세상을 꿈꾸자는 재미있고, 좋을 글들, 고리끼의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정리해봅니다. 특히나 MB의 막무가내, 경제위기 속에서 단지 개혁이 아닌 다른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도전들이 넘쳐나고, 미네르바가 '레오 휴버만'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는 책을 추천하면서 사회과학 서적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을 보면 '변혁'이라는 말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이 쉽지만 않은 거대담론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는 '계몽'필요하다는 gyuhang님의 글에 대해 써볼까합니다.

우선 막심 고리끼의 소설<나의 대학>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내가 직접 목격했던 모든 것들은 거의 완벽하리만큼 인간에 대한 자비와는 무관했다. 내 앞에서 삶은 적대감과 잔혹성의 끝없는 고리처럼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추잡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오직 책밖에 없었다.....한 시간만 길거리를 나돌아다니거나 대문간에 앉아 있어 보면 마부, 머슴, 노동자, 관리, 상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들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는 개미들의 너저분하면서도 눈치 빠른 노동에 비추어 볼때 대체로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실상 그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의 일반적인 질서에 예속되어 가고 있었다...

막심 고리끼의 소설은 당시의 러시아 노동자들의 삶을 매우 생생하게 재현하는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나의 대학>은 비참한 러시아 노동자,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난한 대학생의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어떤의미에서 지금의 현실도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죠.

저의 한 측근은 취업준비하는 대학4학년인데, 계속 고배를 마시다보니 이제는 자신이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어 무기력감에 빠져있기 일쑤입니다. 취직해서도 자신의 자아계발이 아니라 기업 이윤을 위한 기계로서 '작동되고'있는 자신을 돌아보면 소외감에 빠지기 쉽겠지요. 이러한 상황이 gyuhang님이 얘기했던 '이상' 또는 '거대담론'에의 접근보다, 당장의 편안한 휴식, 월급날짜, 평범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몸부림에(참 평범하게 사는게 더욱 힘든 세상이다.) 생각과 행동을 집중하게 만들곤 합니다.

gyuhang님은 '촛불과 지식인들'이란 제목으로 좋은 글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중 2.5번째 글은 '계몽이 필요하다'는 주제인데 한번 인용해보겠습니다.


‘대졸자가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무슨 놈의 계몽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놈의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적 안목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대졸 성인은 사회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에서 좋게 보아도 프랑스나 독일의 중학생을 넘지 못한다. 계몽은 분명히 필요하며, 문제는 ‘계몽의 방식’이다.

진정한 계몽은 80년대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대상화하여 지도하고 영도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인이 대중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조선노동자가 배를 만들고 교원노동자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부가 농사를 짓듯 지식인은 ‘지식노동’을 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 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GYUHANG.NET

촛불과 지식인들 2.5 - 꿈을 잃어버린 세상의 풍경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적 안목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곳"인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고 계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십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계몽이 필요한 사람의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계몽을 제공할 능력을 가진 일종의 '지식인'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주입'한다는 관점은 주의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고리끼 소설의 주인공이 사회를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도 유사한데, 지친 노동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나'와는 달리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깨우침을 받아야할' 대상으로 비춰집니다.

gyuhang님이 '지도'라는 말과 굳이 선을 그으며, 계몽이란 '수평적'인 관계의 노동이라며 지도와는 달리 '일방적'이지 않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매하고 불쌍한 민중을 깨우치고 지도하여 해방'시키려 했던 80년대 운동권의 한계를 비판하며 그와는 다른 '계몽'을 이야기 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지도'의 개념은 쌍방향적인데 반해 '계몽'의 개념은 일방적이고 하향적인 개념입니다.

더구나 80년대 당시의 한계가 과연 '지도'때문이었나는 의문이 듭니다. 87년 6월 항쟁을 예로 들면그 당시의 한계는 자본가계급에 기반을둔 통일민주당이라는 개혁주의 정당이 6월의 항정을 잠재우고 의회로 수렴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런 개혁주의 관점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관점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 의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몇몇 의원들만이 그들의 바램을 '대신'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방적이고 하향적인 개념이 아닐까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의회나 개혁주의 정당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조합 조직을 만들고 실질적인 요구들을 쟁취하게 됩니다.(이것은 6월항쟁의 성과이겠지요)

지난 촛불운동의 교훈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항의 촛불>의 기사를 인용할게요

그러나 운동이 정점에 도달하고부터는 온건파 NGO 지도자들이 앞장서 운동의 수위를 조절하려 노력했다. 온건파 NGO 지도자들은 운동의 규모가 더 커지지 않고 부드럽게 연착륙하도록 애썼고, 광우병 위험 쇠고기 문제라는 단일 쟁점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의제 확장’(요구 확대)은 실질적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이었다.
<저항의 촛불>4호
"1987년 6월 항쟁과 2008년 촛불항쟁, 무엇이 달라졌나"


온건파 NGO 지도자들의 잘못된 '지도'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자기해방'의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몽'되어야 할 수동적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gyuhang님의 의도는 NGO온건파 지도자들의 의도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연재글 첫번째 편만 보더라도 여러 쟁점들의 투쟁이 '자본주의'라는 구조(거대담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개혁이 아닌 급진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이에 저도 충분히 동질감을 느끼고 있고요.

따라서 운동이 더 나아가고 단결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계몽'이 아니라 적절한 '지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온건파 NGO지도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자신들끼리 모여 음모적으로 개혁주의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운동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지도'말입니다.

gyuhang님. 블로그 초보에다가 많이 알지도 못한 제가 감히 딴지를 거는 것같네요. 사실 동감하는 부분이 훨씬 많답니다. 글 정말 재밋게 보고 있고요. 많이 얻어가기도 합니다. 의견있으시면 걸어주시면 영광입니다.~^^